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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의 의병장 담산 안규홍/동소산의 머슴새(문병란)

바람강 2011. 3. 24. 10:49

                               

                      동소산의 머슴새 / 문병란

 

                   펄럭거리는 의병기를 동소산 중턱에 꽂았다

                   우와! 우와! 만세! 만세!

                    50명의 장정들 힘차게 함성을 지른다

                    어제까지는 일개 초야의 머슴이었지만

                    오늘부터는 이 나라의 당당한 의병

                    왜적과 싸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열혈의 남아들

                   동소산이 떠나갈 듯

                   만세소리 골짜기를 메아리 친다

 

20년의 머슴살이

일경 전라남도 경무과가 1913년 작성한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에서 일제는 우리 의병들을 폭도’, ‘비도’, ‘으로, 의병장을 적장’, ‘수괴’, ‘거괴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남폭도사에 한말 의병장 안규홍(安圭洪, 1879~1911)이 일군에 체포되는 기록이 있다.

“925(1909) 오전 9시 보성군을 본거지로 각 군을 횡횡하여 온 거괴 안규홍이 우리 작전의 중압(重壓)에 못 견뎌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현 문덕면 양동리 법화부락)에 잠복 중 제 8중대장 도미이시(富石) 대위 이하 6명과 한인 순사 2명에게 체포되었다. 31, 거괴 안규홍은 융희 2(1908) 4월 순천 부근을 점거한 강용언의 부장으로 있다가 동년 5월 어떤 일로 해서 강을 원망 그를 죽이고 스스로 수괴가 되어 보성군을 중심으로 각 군을 날뛰었다. 그 세력이 한창 일 때는 부하가 2백 명을 넘었고, 전해산 심남일과 나란히 폭도 거괴 중 첫째가는 인물이다.”

일군에 의해 폭도 거괴 중 첫째가는 인물로 평가받았던 남도 최고의 의병장 안규홍이 20년이나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한 담살이였음을 아는 자는 적다.

안규홍은 1879년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태어난다. 문강공 안방준(安邦俊, 1573~1654)10대손이었지만, 오래전부터 가문이 쇠락하여 태어날 당시 경제력은 매우 궁핍했다. 4살 때 부친이 죽자 어머니 정씨는 문덕면 법화리에 사는 먼 친척뻘 되는 박제현의 집에 의탁하게 된다. 밥값을 위해 10여세의 어린 나이에 시작하여 20여년 머슴을 업으로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머슴살이를 했기 때문에 담살이(나이 어린 머슴)로 불리었고, 그의 의병부대도 안 담살이 의병으로 불렸다.

 

빈농이 중심이 된 의병부대

안규홍이 어떤 인물인지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안규홍 사후에 편찬된 담산실기(澹山實記)’에 의하면, 그는 매우 강직한 성품을 지닌 청년으로 자란 것 같다. 그의 강직한 성격은 세금을 걷는 관리가 규홍의 동네에 와 횡포를 부리자, 홀로 횡포한 세리(稅吏)를 혼내 준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후일 규홍이 나이가 적고 체구가 작았음에도 의병장에 추대될 수 있었던 한 이유였다.

19082, 마을을 지키던 방도(防盜)조직을 기반으로 의병을 모았지만 신망이 없다는 이유로 유지들의 지원을 받는데 실패한다. 이에 안규홍은 함경도 출신으로 순천에서 활동하던 강용언 부대에 투신하여 부장이 된다. 그 후 강용언이 양민을 살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일삼자, 19084월 강용언을 제거하고 문덕면 동소산에서 의병장에 추대된다.

빈농과 머슴을 중심으로 거병한 안규홍 부대는 426일 보성 파청 전투를 시작으로 이듬해 9월 까지 보성 순천을 중심으로 일군과 수많은 전투를 벌인다. 일본 헌병 3명을 사살한 파청 전투를 시작으로 안규홍이 체포되는 다음해 9월까지 보성의 대원사 내가령치, 화순의 운월치 등에서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일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대가 된다.

안규홍 부대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일군은 19094월 광주와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2개 대대 병력을 출동시킨다. 그리고도 진압할 수 없자, 9월에 들어 보다 적극적인 '의병 토벌책'을 구상하게 된다.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라 불린 전남지역의 의병 근절책이 그것이다.

190991일부터 10월 말까지 두 달 동안 펼쳐진, 전남 의병을 초토화시키기 위한 이 작전에 보병 2개 연대, 공병 1개 소대를 비롯한 군함 수척, 해군 11정대 등이 동원된다. 일제의 대토벌작전이 전개되자 안규홍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의병을 해산한 후 피신 도중 피체되고, 이듬해 5월 교수형에 처해진다. 정부는 1963년 안규홍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동소산의 머슴새

첫 전투지였던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에는 의사 안공 파청승첩비(義士安公巴靑勝捷碑)’가 서 그날의 승리를 기리고 있다. 그러나 담살이 의병장을 기억하는 자는 많지 않다.

시인 문병란은 '담살이'라는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구국의 일념으로 거병한 뒤 무적황군이라 불리던 일군을 도처에서 격파했던 안규홍 의병장과 부대에 동소산의 머슴새라는 시를 받친다.

 

 

1879(고종 16). 4. 10 전남 보성~1911. 5. 5.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죽산(竹山). 별명은 계홍(桂洪)·안담살이·안진사. 자는 제원(濟元), 호는 담산(澹山). 아버지는 달환(達煥)이다. 어린시절에 머슴살이(담살이)로 홀어머니를 모셨다.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뒤 일제가 대규모 병력을 이용해 의병들에 대한 살육작전을 벌임에 따라 의병투쟁의 양상도 유격투쟁으로 바뀌고 평민의병장의 등장이 보편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하여 처음에는 유지들에게 도움을 얻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함경도 출신으로 순천 부근에서 활동하던 강성인(姜性仁) 부대에 투신하여 부장(副將)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강성인이 양민을 살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하자 1908년 그를 군율대로 총살하여 군기를 확립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부대에는 염재보(廉在輔)·송기휴(宋基休)·이관회(李貫會)·송경회(宋敬會) 등이 있었다. 이들은 전라남도 지역의 시장을 돌면서 인원을 보강했고, 그 과정에서 병법에 밝은 오주일(吳周一)이 합세했다. 보성 동소산(桐巢山)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1908년 일본군이 '보성폭도토벌대'를 구성하여 보성·벌교·순천 등지에 포진하여 의병대를 공격하자, 매복하고 있다가 보성헌병분견소의 헌병을 기습하여 2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뒤 대원산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다. 6월 보성군 내에 있으면서 부하를 시켜서 일본군이나 일본군 통역관을 살해하기도 하고, 헌병·경찰 연합토벌대가 습격해오자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8월 장경선(張京善)을 참모로 삼아 병력을 증강하고 진산(眞山)에 집결했다. 이때 헌병분견대 병력이 인근 수비대 경찰과 연합토벌대를 만들어 포위해오자, 의병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직접 천보총(千步銃)으로 적의 선봉을 쓰러뜨렸다. 이에 의병들이 용기를 내어 전투에서 승리했다. 1909년 1월중에 밀정이 있어 아군의 정보가 새나갔지만 이를 모른 체하고 적의 행군요소에 복병하고 대기하다가 세 방면으로 공격하여 적을 무찔렀다. 3월에는 원봉에 주둔하던 적을 기습했다. 이때 와타나베 부대[渡邊部隊]와 2개월에 걸쳐 10여 차례 접전했으며, 와타나베가 한국인 첩자를 보냈으나 이를 역이용하여 와타나베를 처형했다. 보성전투에서는 전과를 거두었지만 유격장 안택환(安宅煥)과 서기 임준현(任準鉉)이 전사하여 장흥 전세가 불리해 백사정(白沙停)으로 후퇴했다. 이때 부하들이 대거 일본군에 투항함에 따라 7월에 부대를 해산했다. 9월 25일 귀향하던 중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밀고하여 부하 염재보·정기찬(鄭基贊)과 함께 토미이시 부대[富石部隊]에 붙잡혔다. 그뒤 광주에 수감되었다가 대구로 옮겨진 뒤 1911년 옥사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