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간(開墾)
風影 林日煥
하얀 도화지를 펼치고 나면
언제나 가슴이 설렜다.
어떤 물감으로 여백을 메울까.
봄은 옅은 분홍색으로 사치를 부리고
강물에 떠가는 꽃잎 몇 개 그릴 생각에
색을 칠하기도 전에 마음이 물들었다.
공간이 채워지면 설렘은 잦아들었지.
비 그친 골목길에서 너를 만나던 날
대숲을 갓 벗어난 푸른 바람 맞으며
강으로 난 좁은 길을 함께 걸을 때
놀 빛에 물든 하늘은 온통 붉은색이었지.
산이 누운 강에서 송사리떼가 자맥질하고
강둑 덮은 찔레꽃 향기에 가슴이 뛰었어.
설렘의 기억이 아득해진 쓸쓸한 가을날.
갈참나무와 망개넝쿨이 뒤엉키고, 봄이면
수리취며 고사리가 돋던 골짜기를 찾아
나무를 베고 땅을 뒤집어 뿌리를 뽑았지.
숲이 사라진 자리, 비어있는 땅 앞에서
콩을 심고 사과나무가 커가는 가슴으로
꽃이 피었다 지고, 열매가 열리고 있었어.
하얀 도화지처럼 맨살로 누운 땅속으로
땀이 스며들고 고단한 시간이 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