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그리운 날들의 이야기

빈 들에 서서/1986.11.18.(새농민지에 투고한 글)

바람강 2011. 2. 4. 17:06

 방구석 어디선가 철 늦은 귀뚜라미가 운다. 바람이 부는지 뒤꼍 대밭에서 우수수 대이파리 긁어대는 소리가 들리고 강 건너 마을의 개 짖는 소리는 괜한 가슴을 울려 쉽사리 잠들 수 없는 밤. 알 수 없는 허전함과 고적감이 엄습하여 이불깃을 끌어당겨 보지만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공기는 쓸쓸함을 더해 줄뿐이다.

  전기요금을 아끼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30촉 백열등으로 어둠을 밀어 내기엔 너무 커다란 방이기에 차라리 불을 끄고 누운지 어언 두어시간. 가슴까지 한기가 스며들고 따스한 정이 그리워지는 것을 보면 이제 나도 때절은 총각생활에 마침표를 찍어야 될 시기가 된 것 같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에는 마당 가 감나무 가지가 잎새를 모두 떨구고 가난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추수가 한창일 때는 피곤함에 지쳐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곤 했는데 한가함으로 시간을 먹어대는 요즘은 원망스러우리만큼 밤이 긴 것만 같다.

  방광에 팽만감이 느껴지자 잠을 포기하듯이 이불을 걷어 제치고 마당으로 나서니 갑자기 서럽도록 밝은 시월 보름달의 싸늘한 빛이 온몸을 내리덮쳤다. 한바탕 부르르 소름을 치며 울타리에다 오줌을 갈기고 마을 앞 들판을 바라 보았다. 달빛만 가득 깔려 있을 뿐 들판은 허전했다. 무심코 내딛는 발 앞으로 아직껏 가지에 달려 있었던 듯 커다란 감나무잎 하나가 곤두박칠 치며 작은 비명을 울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가장 큰 물감을 열 접 이상씩 매단 채로 가을을 맞이하곤 하던 감나무엔 늙어버린 탓인지 겨우 한 접 남짓 수확한 올해도 벌써 잎이 다 지고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맨 꼭대기의 감 하나만 외롭게 달랑 남아 있다.

  목적없이 사립문을 밀치고 나선 나는 논배미를 양 편에 거느린 채 농로를 걷고 있었다. 발부리에 차이며 바짓가랭이를 적시는 이슬의 감촉이 섬찟하도록 차다.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길의 가장자리엔 달맞이꽃이 다 시들어 앙상한 줄기만 남아 있었다.

  어디선가 나를 주시하고 있는 눈이 있는 것 같이 피부를 찔러오는 오싹한 느낌이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저 앞쪽  논 가운데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굴까? 이 만추야의 들판에 이슬을 맞고 서 있는 저 사람은 정령 나만큼 잠 못 이루는  사연이 있을까?"

  발걸음을 빨리 했다. 누가 되었든 간에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들어 줄 사람없어 가슴속에만 묻어 두었던 말을 후련하게 토해 내고 싶었다. 아니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고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조금은 설렌 발길이 농로를 벗어나 논두렁을 몇 개인가 넘어서 가까이 다가갔을 때 거기엔 뜻밖에도 허수아비가 혼자 떨고 있었다. 너무나 잘 만들어진 허수아비에 내가 속았다고 생각하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얀 위아래 한복에 점잖게 밀집모자까지 썼지만 한쪽 팔의 뼈대가 떨어져 나가 팔소매가 축 처진 것이 여간 안쓰러워 보여 가만히 옆에 서서 어깨동무를 해 보았다.어깨가 온통 이슬에 젖어 축축하던 것이 조금 지나자 체온이 있는 듯 따뜻해지기 시작했지만 허수아비는 여전히 멍 하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텅 비어 있는 들판을...

  댐 건설 관계로 지난달에 농토에 대한 보상비까지 받고 이주지를 물색하러 다니는 마을 사람들이 보리갈이를 했을 리가 없지만 왠지 오늘은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사 갈 때 가더라도 보리씨라도 뿌려 놓았더라면 이다지 들판이 허전하지는 않을 텐데... 아니 허수아비가  할일 없어 이토록 외로워 하지는 않을 텐데...

  공허한 마음은 메우지 못해 안달을 하는 인간들이 허한 들녘은 왜 메우려 하지 않는지 원망스럽다. 이 들이 황금물결로 가득하던 지난 날은 바라보기만 해도 얼마나 배부르고 뿌듯했던가?  또 농약 탓에 줄어들었다던 참새들이 다시 극성을 부려대도 그들을 달래며 풍요를 지켜 주던 허수아비는 얼마나 의젓해 보였던가? 먼 훗날 물 속에 잠겨버린 고향을 그리며 어느 낯선 하늘 아래선가 내가 외로워 할 것처럼 이 허수아비도 우리의 땀을 받아 먹고 벼가 익어가던 그 가을날을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비어 있는 것처럼 허전한 건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나무도, 들녘도...

  이제 정녕 겨울이 산을 타고 내려오는 계절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앞으로는 이렇게 허수아비가 빈 들에 서 있게 하지는 않으리라. 하루 빨리 독새풀이라도 촘촘히 돋기를 기대하지만 내년부터는 그 어떤 이유로도 농토를 놀리지는 않으리라. 먼 산 허리에 밤안개가 띠를 두르기 시작한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계속 찬 바람만 불어대는 내 가슴을 채워 줄  따뜻한 정을 가진 사람을 만나 30촉 백열등으로는 다 밝히지 못하는 방마저도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낙엽들이 얼어 붙고 된서리가 온통 지붕을 덮는 밤에도 이불깃을 추스리지 않아도 춥지 않을 꿈을 잉태해야 되겠다. 잎새 떨군 가지들이 저토록 추위에 떨고 할일 잃은 허수아비가 이토록 안쓰러울 때 할일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처량해 보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부대끼면서 빈 가슴들을 채우려 하나 보다.

  남의 땅까지 빌어 3,000여 평의 밭에 배추를 심어 운임도 안 나오는 배추를 팔러 갈 엄두도 못내고 마을 사람 누구든지 김장 할  만큼씩 뽑아 가라며, 장래를 약속했던 여자가 단지 농촌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반대를 하는 자기 어머니의 말에 따라 서울로 시집을 가 버렸다고 울먹이며, 자기도 서울로 가겠다던 종갑이를 만나고 싶다. 아니 저 빈 들판처럼 젊은 날의 기억만 간직한 채 임종의 날만을 헤아리고 계실지 모르는 우리 할머님이 뵙고 싶다. 그래서 무진장한 나의 꿈으로 쓸쓸한 할머니의 마음을 가득 채워 드려야지.

  허수아비에게서 손을 떼고 농로로 돌아와 집으로 향하려니 왠지 발걸음이 무겁다. 간절히 나를 붙안고 놓아주기 싫어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아! 빈 들에 혼자 서 있는 외로운 허수아비가 아닌가?' 아무래도 그대로 버려두기엔 마음이 아파 되돌아 달려가서 허수아비를 뽑아 집으로 들고 왔다.여전히 커다란 방이고 싸늘한 이불 속으로 나 혼자 파고 들어야 하지만 허수아비를 뽑아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남 보성군 문덕면 덕치리2구 92번지)

 

 

---------------- 심     사     평  ----------

수필 오양호(문학평론가)

- 이 달의 작품 중 임 일환의 "빈 들에 서서"를 재미있게 읽었다.

  "빈 들에 서서"는 곧 수몰될 땅에 내팽개쳐진 네 존재 -보리도 심지 않고 독새풀도 자라지 않는 빈 들, 그 위에 쏟아지는 달빛, 그 들녘의 허수아비, 그리고 작자, 이 넷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글이다. 특히 허수아비를 사람으로 착각하고 그것과 어깨동무를 해 보고, 돌아올 때 뽑아 들고 왔다는 글 마무리는 이 글 한편에 깔려있는 작자의 외로움을 정리하는 돋보이는 기교다.

   이런 점이 이 글의 장점이다. 글이 설명되어서는 안되니까...

 

 

    *. 이 글은 1987년 새농민지에 채택되어 실렸고 그 해 새농민지에 실린 글 중에서 년말에 한편을 뽑아

     시상하는 새농민 문학상(농수산부장관상)을 받은 글인데 그대로 올겨 보았다.

       이번 설에 성묘를 가서 그 들판마저 삼켜버린 주암댐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그날의 회상에 잠겨드니

      그 고샅이며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고향 사람들이 새삼 그리워져 가슴이 젖어

      들었다. 참 좋은 곳, 따스한 곳이었는데 이젠 쓸쓸하고 허허로움만 준다.